[창세기] 12. 제삿상을 데칼코마니로 차리면 가나안 땅은 피로 물든다

야훼가 아브람의 환상 속에 나타나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라고 다정하게 말한다.

일단 난데없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부터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음. 아브람은 최근까지 사병 300명 넘게 끌고 가서 4개국 연합을 물리치고 조카 롯도 구하고 전리품도 많이 벌어 온 짱 쎈 상태다.

어쩌면 지금 아브람은 심한 몸살이라도 난 상황이고, ‘아이고, 이러다 죽겠구나, 아들도 없는데ㅠㅠ 죽으면 재산은 엘리에셀이 가질 텐데ㅠㅠ‘ 하고 더럭 겁이 난 와중에 헛 것이라도 본 게 아닌가 싶다.

(엘리에셀은 다마스쿠스 출신의 종이라고 하는데, 아마 총집사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나 봄)

그래서인지 환상 속에서 야훼가 나타나자마자 ‘아냐, 걱정 마. 너한테 친아들 생길 거’라며 바깥으로 데리고 나간다 .

그러더니 분위기가 갑자기 로맨스로 변한다.

야훼: 브람아, 내가 너한테 자손을 얼마나 많이 줄 거냐면…

아브람: …땅의 먼지만큼?

야훼: 저 밤하늘의 별만큼♥

아브람: …

(낭만적인 음악이 흐르며, 카메라, 밤하늘을 훑는다.)

와아♥

야훼: 저 별들을 보렴. 셀 수 있으면 한 번 세 봐. 내가 너, 자식들 저만큼 생기게 해줄 거야.

아브람: 믿을게요.

야훼: 브람이는 착한 아이구나. 네가 도시 우르에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내가 이 땅을 너한테 주려고 그런 거란다.

아브람: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여기서 분위기 갑자기 고기뷔페 됨.

야훼: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산비둘기 한 마리, 집비둘기 한 마리 주문이요.

아브람은 비둘기는 통으로, 나머지들은 몸통 가운데를 쪼개서(…)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고, 솔개들이 스틸하려는 걸 막아가며 기다린다.

지나치게 잔혹한 장면이라 비슷한 이미지로 대체합니다.

이제 다시 분위기는 오컬트 호러가 된다.

나레이션: 해가 질 무렵,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때 그의 귀에 나지막히, 미지의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저주 같기도 했고, 축복 같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은 숨을 죽이고, 영혼을 울리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너의 자손들은 타국에서 객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으로 전락해서, 사백 년 동안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미지의 속삭임은 말주변이 없었습니다.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는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고, 네 자손은 재물도 많이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근데 너는 오래오래 장수하다가 죽을 거임. 아무튼 네 자손은 종살이 하다가 사대째가 되어서야 돌아올 건데, 왜냐면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기엔 좀 이르거든.”

아무래도 아까, ‘지금 여기 이 가나안 땅을 우리 자손들이 갖게 되는 거 맞냐’고 물어본 데에 대한 답인 것 같았습니다.

요약하자면, ‘갖게 되긴 하겠지만 중간에 어디 400년 간 끌려가서 종살이하며 고생하게 될 거고, 재물 챙겨서 다시 돌아오긴 할 것’이란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아모리 사람의 죄 어쩌고 하는 걸로 보아, 아브람의 후손들을 끌고 갈 사람들은 아모리인이 될 모양입니다.

역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인간의 순차적인 시간 개념의 바깥에 존재하는 신이라 그런지, 본인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이유로 남도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앞뒤없이 말하시는 부분이십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자,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데칼코마니 제사상 활활

(고기 타는 연기가 일면서)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주마. 겐 사람과 그니스 사람과 갓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르바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을 다 포함한다.”

노아가 함한테 저주를 내렸기 때문에 함네 지역을 다 포함해서 패키지로 드림

기대 못한 규모. 이 엄청난 선물에 아브람은 행복에 부풀었습니다.

이 말이 앞으로, 4000년 가까이 이 땅을 자신의 자손들의 피로 물들일 끔찍한 분쟁의 씨앗이 될 거란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말이죠.

어쩌면 아브람은 그간 야훼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어떤 다른 저주받을 존재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존재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10 Comments

  1. 정말 너무 재밌고 글쓴이님의 신선한 관점을 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즐겨찾기 해놓을테니 연재 쭉쭉 해주세요 너무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Liked by 1명

  2. 우연히 클릭했다가 넋을 놓고 여기까지 읽었네요. 선생님, 돈건강시간 다 가지시길 바라며, 언능 계시록까지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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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ㅋㅋㅋㅋ 넘재밌어요. 지치지 마시고 계속 써주세요~~

    신/천사가 나타나서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의 모습이 이 세상의 외모가 아니기(써놓고 보니 당연한 말이군요) 때문에 사람이 그 모습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크툴루를 대면한 인간들의 공포처럼…
    http://m.blog.daum.net/sheepjh/17670654

    게다가 사사기 6장 22-23절을 보면 (개역개정)

    (삿 6: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삿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 시대 사람들은 ‘천사를 직접 보게 되면 죽는다’ 라고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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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충 설명 감사합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아브람은 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야훼와 자주 소통하던 사람인데, 이번에만 특별히 무서운 모습(딱히 본 모습일 리도 없는 것 같지만)으로 나타나서 놀래켰나 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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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넵ㅋㅋㅋ 듣고보니 저도 쫌 궁금해서 빠르게 찾아봤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15장 이전까지는 소리로만 소통했다면 15장에서는 직접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이전에 등장할 때는 (창 12:1, 창 13:14) ‘이르시되(said)’ 라고만 되어있지만, 15장 1절은 ‘환상중에’라고 되어있고(개역개정), 영어로는(KJV, NIV 및 많은 역본들) ‘in a vision’이라고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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