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니, 야 이건 선 넘었지

아브라함과 사라는 심한 늦둥이로 외아들을 얻게 되었다. 아들이 모든 것이던 그 시대에, 부부가 이삭을 얼마나 소중하게 길렀을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런데 시험을 치기 좋아하는 야훼가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려가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하갈과 이스마엘도 내쫓았는데 지금 와서? 게다가 자기가 직접 이삭을 점지해줘 놓고?

아무리 시험이었다해도 이런 요구는 듣지 않고 때려엎어야 현대인의 윤리겠지만, 아브라함은 고대인이라 순종한다.

이런 인권 유린 수준의 순종을 여전히 미덕인 것처럼 가르친다고 하니, 교회의 컨텐츠가 현대 사회에 지나치게 해롭다. 19금 붙여야 함.

우려되는 마음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 사랑한다면서 이런 것도 못해 줘?‘ 같은 시험을 요구하는 관계라면, 상대가 부모든 애인이든 친구든 신이든 목사든 조직이든 무조건 칼절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길 권함.

아무튼 가스라이팅 오지게 당한 것 같은 아브라함은 바로 당나귀에 장작을 싣고, 종 두 명과 이삭을 데리고 3일을 걸어가 모리아산에 도착한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까지의 여정

종들과 당나귀는 산 어귀에서 기다리게 하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챙긴 뒤 이삭에게 장작을 지게 해서 산에 오른다.

자, 오붓하게 우리 둘만 가는 거란다.
헤헤 좋아요 아부지.

이삭은 해맑음.

“아버지, 번제로 쓸 어린 양은 어디에 있어요?”

“얘야,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실 거란다.”

으 자기가 직접 살해할 친아들한테 저렇게 말하니까 영락없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같음;

헤헤헤 좀 무겁지만 견딜만 해요, 아부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브라함은,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상태인 것 같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믿지 못하던 때,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유산 물려줄 외아들로 여기며 애지중지 14년 가량이나 기른 사람이다.

사라야 하갈과의 관계가 엉망이라 이스마엘을 예뻐할 수 없었겠지만, 아브라함은 아니다. 그냥 자기 친아들임.

이스마엘아, 이것들은 모두 다 네 거란다.

그런데 사라의 강력한 요구에, 고통스러웠지만 이삭이 있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라 믿고, 이스마엘을 죽으라고 내쫓았다.

기적이 없는 한, 이스마엘은 사막을 헤매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또는 자신을 예뻐하던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 구하러 오길 바라며 갈증 속에서 숨을 거뒀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며 살아가는 아브라함이 과연 정신이 멀쩡할 수 있었을까?

무럭무럭 자라서 이스마엘의 나이가 되어가는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평생 갈망하던 아들을 너무 늦게 갖게 되었는데, 그 행운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전에 자기 손으로 죽게 했고, 아들을 가질 팔자가 못된다는 불운한 감각이 자기에게 더 익숙해지고 말았고, 이삭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지고, 자기가 죽을 때까지 이삭과 함께 할 거란 안정감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고, 언젠가 이삭과도 고통스러운 이별을 할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언제나 깨질 것 같은 꿈 속인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의 귀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바쳐야 한다‘ 는 환청이 들려온 건 아닐까?

그건 자기 자신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소리였음에도,

그래,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내가 아들을 무사히 가질 리가 없어!‘ 같은 어떤 확신이 드는 거다.

이삭에게 기대가 커질수록 함께 불어나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던 삶에서, 다시 아들이 결핍되어 불행하지만 안정적인 궤도로 돌아가려고 하는 심리적인 어떤 관성.

아들을 내가 먼저 포기하면 편할 것 같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빚어내는 기묘한 심리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평생 지나치게 가난하게 살다가 거액의 로또가 되어버리자, 그 행운을 견디지 못하고 탕진해버린 뒤 오히려 빚까지 지고야 마는 마음이 아닐까? 돈이 당연하게 항상 있다는 감각을 못 배운 것임.

마찬가지로 아들이라는 행운이 당연하게 있다는 감각, 안정적으로 아들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는 감각이 없고, 이것이 다 신기루인 것만 같아서 감당이 안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묶어 제단에 올린 후, 정말로 죽이려고 한다.

어쩌면, 이 아들을 믿고 안심하고 기대해도 되는지, 그 증명을 신이 해주길 원하는 마음이 ‘나더러 신앙을 증명하라 하실 게 분명해‘로 투사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아버지가 나한테 이럴 수가?

그러나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네게 제일 소중한 것까지 아끼지 않는 걸 보니 테스트 통과! 골든벨!‘ 이라며 말려줘서 이삭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으으 이삭의 표정…

난 천사가 나타나서 멈췄기보다, 아브라함도 도저히 저질러 버리고 싶지 않던 차에, 마침 야생 숫양이 덤불에 걸려 있는 걸 먼저 보고, ‘아, 시험 통과했나보다. 이삭을 계속 기를 수 있다는 계시인가 보다!‘ 라고 여기게 된 것 같다.

그러니 그 순간 또 환청이 들렸던 거다. ‘넌 시험 통과임. 이삭으로 하여금 자손을 번창하게 해줄게. (이제 맘 놓고 아들 길러)’ 같은.

?
아 나 뿔이, 아 뿔, 아

아무튼 그래서 그 장소를 ‘야훼이레’ 라고 하는데, ‘야훼가 보다, 증명하다’ 란 뜻의 지명이다.

(근데 야훼라는 신의 이름을 절대 발음하지 않고, 대신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걸 ‘아도나이 이르에’ 로 발음한다.)

이 일화로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 같은 관용문이 생겼다고 함. 지금까지 쓰는지는 모르겠음.

이 광란의 쇼를 한 뒤 이들은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온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덤불에 뿔 엉킨 숫양 덕분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런 마음의 병 같은 건 약 먹으면 잘 낫습니다)

이제 그 이상의 거대하고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아들 이삭을 덮쳐버렸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돌아오는 이삭의 모습

9 Comments

  1. 와 해석 넘좋아요.. 가스라이터 야훼때문에 이삭을 토스트 할 뻔 했군요.
    과거의 불행을 반복하는걸 옆에서 지켜보면 참 답답하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어보면 그 길밖에 보이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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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전에 이 일화를 볼 때, 사이비 종교가 이래서 무서운 것인데… 믿음 하나로 애를 죽일 지경에 이르다니! 이렇게만 생각해봤는데, 아브라함의 정신역동을 함께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확고한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어떤 책들을 읽어오셨기에 이렇게 다양한 지식을 적용하여 글을 쓰실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추석입니다. 불신자 선생님 즐거운 추석 보내시고, 남은 하반기도 모쪼록 건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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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들을 내가 먼저 포기하면 편할 것 같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빚어내는 기묘한 심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 같은 해석입니다. 막연한 신앙, 철저한 순종.. 이런 얘기보다 훨씬 더 와닿고 그만큼 먹먹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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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물야물 (@shrewd0319) 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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